[오피니언 기고] 살 권리와 버릴 권리, 그리고 수리할 권리
[오피니언 기고] 살 권리와 버릴 권리, 그리고 수리할 권리
  • 윤대영 / yoondayyoung@seouldesign.or.kr
  • 승인 2022.02.03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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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R제도는 소극적 기업에 소비자 요구
미국 20개주 소비자 수리권 법안 입법
세계 한 해 5000만톤 전자제품 폐기
국내 업사이클 기업 인라이튼, 제품 수리
폐기 책임지며 순환 경제 시대 앞당긴다

2017년 미국 네브라스카 주에서는 애플(Apple)사가 주 상원의원에게 수리권 보장법을 통과시키지 말라고 압력을 가하는 일이 있었다. 2018년 뉴욕 주에서도 메타(옛 페이스북)나 도요타(Toyota)같은 대기업들이 비슷한 시도를 했다. 수리권(Right to Repair)은 소비자들이 구매한 제품이 고장나면 직접 분해하고 수리할 권리를 말한다. 제품 수리를 위해 부품 공급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제품 보안코드를 가능한 공개하라는 요구에 기업은 법안 폐기를 위한 로비를 했고, 시민들은 수리권 보장 시민운동 캠페인으로 맞섰다.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1회용품처럼 버려지는 진공청소기가 너무 많다. 사진=서울새활용플라자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1회용품처럼 버려지는 진공청소기가 너무 많다. 
사진=서울새활용플라자

결과는 기업의 완패로 끝나가고 있다. 2019년 말 기준 미국 20개 주에서 소비자들의 수리권 법안이 입법됐다. 지난해 말 미 연방 정부 저작권청에서도 디지털 기기에 대한 소비자의 수리권을 뒷받침하는 법안 수정을 마쳤다. 쓸만한 제품을 수리하면서 오래 쓰고 잘 버려서 제품 생명 주기를 늘리고 환경을 보호하려는 시민들의 수리권 요구는 기업의 존재 이유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수요 공급 경로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들게 한다.

전 세계에서 한 해에 5000만 톤 이상의 전자제품이 폐기되고 있다. 2019년 1월 세계경제포럼(WEF)에 보고된 전자폐기물 관련 지속가능경제보고서(PACE)에는 버려진 전자제품의 양을 가늠케 하는 재미있는 그림이 실려 있다. 그것은 12만 5000대의 점보 제트기와 맞먹고, 에펠탑 4500 개에 해당한다. 땅바닥에 깔면 뉴욕 맨하탄을 가득 메울 수 있는 양이다. 

제품을 개인이 직접 혹은 수리 전문가에게 의뢰해 적정 비용으로 수리하려고 하는 수리권(Right to Repair)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 사진=인라이튼
제품을 개인이 직접 혹은 수리 전문가에게 의뢰해 적정 비용으로 수리하려고 하는 수리권(Right to Repair)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 
사진=인라이튼

이 보고서는 전자폐기물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원인으로 개인용 전자제품 사용량 증가와 배터리 기술의 혁신, 그리고 운송업계의 녹색혁명 등을 꼽았다. 2018년 300만 대에 불과하던 전기차가 2030년에는 1억 2500만 대로 늘어난다는 전망이다. 새로운 제품과 부품의 지속 개발, 신기술 등장으로 국제 표준이 계속 바뀌면서 전자폐기물도 끝없이 늘어나고 있다. 

그동안 기업은 제품을 생산하고, 소비자는 사서 썼다. 사람들이 쓰다가 버리는 물건들이 너무 많아지자, 원래 그 제품을 생산했던 기업이 다시 가져가서 최대한 재활용하도록 정부와 시민들이 압박했다. 생산자가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 재활용에 들어갈 비용 이상을 부과하는 것이 생산자책임 재활용제도(EPR)이다. 하지만 기업은 부과금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재활용에는 소극적이다. 번잡한 재활용에 투자하기보다 부과금을 내는 편이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네델란드에서 시작된 리페어카페 운동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전 세계 시민들의 수리권 보장 운동으로 확대됐다. 사진=서울새활용플라자
네델란드에서 시작된 리페어카페 운동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전 세계 시민들의 수리권 보장 운동으로 확대됐다. 
사진=서울새활용플라자

제품을 만들 권리가 기업에 있고 제품을 살 권리가 소비자에게 있다면, 제품을 버릴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그리고 제품을 수리할 권리는 누구의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권리’를 ‘의무’로 치환해보자. 이 세상에 제품을 만들 의무와 사고 버릴 의무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결국 제품을 수리할 의무가 누구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생산자에게 폐기물 재활용의 의무를 부과하겠다는 EPR 제도가 유명무실해진 것에 실망한 소비자들이 왜 수리권을 요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미세먼지 시대, 코로나 집콕 시대에 고장난 진공청소기 수리 서비스로 유명해진 기업이 있다. 주로 해외에서 직접 구매한 진공청소기를 전문으로 수리해온 업사이클 기업 ‘인라이튼’은 제품을 수리할 권리가 소비자에게 있음을 끈기 있게 주장해왔다. 가격대비 수리비가 비싸 수리효용성이 크게 떨어지는 저가의 제품들이 마치 1회용품처럼 쉽게 버려지는 걸 봐왔기 때문이다.

인라이튼은 이를 위해 구매 후 폐기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는 청소기 ‘뉴트’를 새로 개발했다. 지난 5년 동안 매년 2만 대의 전자제품 수리를 하며 축적한 ‘안심배송시스템’을 활용해 제품 수리를 넘어 안전한 폐기까지 소셜 벤처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소비자들이 저가의 수리 비용으로 제품을 오래 사용하게 하고 플라스틱 폐기물도 줄이겠다는 작은 기업의 소박한 꿈이야말로 우리나라에 순환 경제 시대를 앞당기는 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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