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 관습타파·장르 불문 ‘새로운 것’ 익히고 발전시켜
[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 관습타파·장르 불문 ‘새로운 것’ 익히고 발전시켜
  • 이영희 기자 / yhlee@ktnews.com
  • 승인 2012.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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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복장 최경자 선생 찾아가
규격탈피한 독특한 스케치 제출
반바지·보라색스타킹 ‘끼’ 발산


70년 늦가을, “패션은 보기 위한 귀족예술이 아니라 입기 위한 대중예술이다”라며 한국 최초로 길거리 패션쇼를 열었다. “패션이 예술이라면 무대에 한정 시킬 수 없다”는 논리로 당시 고정관념에 파격과 일탈을 날렸던 디자이너, 아니 ‘예술가’ 손일광(一光)선생. 대한민국 남성 1세대 디자이너이자 전위예술가로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제 4집단’의 창립 핵심멤버였던 손 선생은 척박한 ‘패션’을 ‘예술’의 장르로 승화시켰다.

60년대부터 ‘명동’은 패션과 예술의 태동이 시작됐고 순수와 낭만, 피 끓는 도전과 창작 열기로 가득찬 곳이었다. 손일광 디자이너의 명동 의상실에는 낮에는 옷을 좋아하는 고객들이, 밤에는 각계 각층의 예술가들이 모여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곳에서 ‘관념’과 ‘규격’에 도전하는 새로운 것에 대한 ‘모의’가 시작되고 ‘열망’이 실현됐다.

한국섬유신문은 창간 31주년을 맞아 손일광 선생의 기억속을 더듬어 ‘패션문화의 원류’를 거슬러 재 조명하고자 한다. ‘패션의 거대 산업화’이전 태동기의 순수함, 디자이너 개인의 역사를 격의 없는 논조로 싣고자 한다.
/글=이영희 기자 yhlee@ktnews.com 사진=강재진 기자 flykjj@ktnews.com



군대를 다녀왔다. 복학생으로 청구대학 화공학과를 다니고 있는데 친구가 찾아왔다. 당시 남자가 디자이너를 한다는 것이 생소했던 때였다. 친구는 ‘앙드레 김’이 실린 잡지기사를 보여주면서 “남자 디자이너라는 남다른 길을 가보자”고 제안했다.

대구에 있는 학원을 찾아 다녔는데 당시에는 디자이너라는 개념보다 재단사, 재봉사 배출의 비중이 컸다. 젊은 청년들이 학원을 찾자 원장은 반색했다고 한다. 야간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70년대 명동을 뒤흔들었던 손일광 디자이너의 첫 걸음마가 시작됐다.

대구에는 ‘오리엔탈양재학원’이 유명했다. 원장은 한국인 남편을 둔 일본여성이었는데 서울에 이어 대구에 분원을 뒀고 서울의 국제복장학원 최경자 선생과 함께 패션교육분야에서는 양대산맥을 이뤘다. 배우는 속도가 누구보다 빨랐다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부추긴 친구는 패션계로 입문하지 않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 청년 손일광은 숙명의 길을 걷게 됐다.

자취생활을 하면서 동네 사람들의 옷을 지어주고 공임을 받아 학비를 충당했다. 남성으로서, 화공학도로서 옷을 짓는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청년 손일광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됐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내고자 했던 열망은 진로를 바꾸고 마침내 인생의 항로를 수정하게 만들었다.

대구에서 남성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꿈을 키우던 청년 손일광을 마침내 ‘서울’이라는 큰물로 올라가게 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손일광 선생은 “ 이화여대 섬유과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방학이면 내려와 같이 공부를 했죠. 어느날, 네 실력이면 서울로 가야지, 왜 이러고 있냐? 고 자극을 하더군요” 친구에 의해 디자이너로 진로를 바꿨고 또 다른 친구로 인해 말 그대로 ‘친구 따라 강남(서울) 간 셈’이 됐다고 한다.

‘룩’ 양복점, ‘뉴스타일’에 선전포고
양측재단사 대치속 명동파출소 출동
서울대생 ‘배천범’과 인연맺는 계기


“패션의 3대 요소는‘소재와 디자인, 봉제’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규격화된 개념에 익숙해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손일광은 기본틀을 벗어난 독특한 디자인 스케치를 가지고 서울에 올라와 1964년 최경자 선생을 찾아갔다.

대구에서 오리엔탈학원을 졸업한 후 서울의 국제복장학원을 찾은 예비 디자이너 손일광의 모습은 최경자 선생의 눈에 띄기에 충분했다. 64년 청년 손일광은 반바지에 보라색 스타킹을 신고 최경자 선생을 찾아갔다. 최경자 선생은 손일광의 예사롭지 않은 ‘끼’를 한 눈에 알아채신 것 같다.

이를 기점으로 국제복장학원에서 3년을 공부하게 된다. 당시 스타일화 교육의 원조로 불리웠던 최준호 선생에게 스타일화를 배웠다. 철저한 기본기부터 착실하게 배워가던 손일광은 자신도 배우는 학생 신분이었지만 탁월한 기량으로 노라노 양재학원에 가서 학원생들을 가르쳤다. “최준호 선생이 스타일화 숙제를 너무 많이 주시는 거예요. 최 선생에게 스타일화를 배우고 노라노 가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50여 명의 학생들에게 숙제를 하게 해요. 그 숙제를 최 선생에게 드리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죠<웃음>.”

명동, 가위전쟁 발발하다
국제복장학원을 졸업하고 양복점 룩(Look)에 취직을 했다. 66년도 당시 월급은 8000원이었다. 명동 일대에서 ‘서마담’으로 불리웠던 룩의 사장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는 이로 근검절약 정신이 투철하고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어느날 룩에서 근무하던 손일광 디자이너에게 명동에서 유명한 ‘뉴스타일’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밤마다 뉴스타일 측에서 사람을 보내와 스카웃 제의를 했고 다른 곳에서 경험을 쌓아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수락을 한 것이 발단이 돼 급기야 경찰까지 출동하는 명동 일대의 큰 비화를 남기게 됐다.

밤이면 룩의 재단사부터 미싱사까지 가위를 들고 뉴스타일 앞에 진을 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손일광 선생이 집을 몇 달씩이나 못갈 지경이 되자 뉴스타일의 사장이 명동 파출소에 신고를 하기에 이른다. 뉴스타일 앞에서 진을 치던 룩의 정한필 지배인은 당시 실력만큼 유명한 인물이었다.

화공학도에서 디자이너가 된 손일광 만큼 정한필 지배인 역시 우체국 공무원에서 전혀 다른 길로 선회한 인물이며 항상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녀 회자되곤 했다. 나중에 명동의 화이트 패션 대표가 됐다. 뉴스타일 사장이 명동 파출소에 신고를 했지만 양쪽의 재단사끼리 밤이면 대치하는 상황은 한동안 이어졌다.

어느날 명동 파출소에서 손일광을 호출했다. “파출소에 갔더니 소장 직속으로 ‘ 배 차장’이란 분이 있었어요. 그 분 동생이 서울 미대를 다니고 있는데 좀 가르쳐 줄 수 있냐는 겁니다. 알고 보니 그 동생이 <배천범>이었습니다” 패션계와 관련 학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한 <배천범 교수>와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서울대 미대를 다니던 청년 배천범은 디자이너 세계에 입문하고 국제복장학원을 졸업했다. 오늘날 존경을 받는 원로들은 이처럼 정해진 장르를 불문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고 계승하는 노력을 젊은 시절부터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배천범 교수는 그 후 국내 패션계의 대형무대를 주도했고 이탈리아 마랑고니로 유학을 다녀와 이화여대 교수로 제직하면서 이론과 현장경험, 해외의 선진 시스템을 아우르는 교육을 통해 후진양성과 패션업계 발전에 기여했다.

룩에서 8000원의 월급으로 시작한 손일광 디자이너가 뉴스타일로 옮기면서 여섯배가 넘는 5만 원을 받게 됐다. 이 월급은 명동에서 활약하던 남자 디자이너 중에서 제일 많은 액수였다. 한마디로 ‘손일광’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은 셈이었다. 뉴스타일에서 열심히 일하던 중 마침내 1968년 대한민국 제 1회 무역박람회에서 개최한 의상컨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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