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 Interview] ■ 하창호 (주)유텍무역 사장 - “기회는 많지만 언제나 준비하는 者에게 손내민다”
[Power Interview] ■ 하창호 (주)유텍무역 사장 - “기회는 많지만 언제나 준비하는 者에게 손내민다”
  • 전상열 기자 / syjeon@ktnews.com
  • 승인 2014.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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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으로 달려 온 원단 비즈니스 31년

늘 자존심 비즈니스 곳초 세우고
잘 나갈 때 위기 대응력 키우면서
도전적으로 변화에 앞장 서 왔다


“동일한 제품인데 일본산보다 반값으로 가격을 내면 ‘짝퉁 대접만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품질만큼은 자신있다는 자부심이 남달랐어요. 이탈리아 바이어에게 일본산 제품에 비해 30% 정도 싸게 가격을 냈습니다. 고가 유럽시장에 한국산 직물 수출을 알리는 신호탄을 쏜 것이죠.”

원단 비즈니스 31년차를 맞는 하창호 (주)유텍무역 사장(55)은 인터뷰 내내 강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제품을 바꾸든, 만드는 방법을 달리하든, 영업방식에 변화를 주든, 바이어 교체에 나서든 3년을 주기로 변화의 선봉에 서왔다. 이 생각은 늘 미래진행형으로 그의 뇌리를 일깨우게 한다.

신합섬 시대를 알리는 서막은 이렇게 올랐다. 신합섬 원사 마이크로화이버를 사용해 짠 피치스킨 비즈니스가 큰 트렌드가 되는 순간이었다. 1989년 무렵의 일이다. 당시 삼양사가 개발한 NP분할사는 한국산 직물의 품질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견인차였다. 이 원사를 사용해 새로운 질감의 원단을 만들어 낸 인물이 바로 박동호(현 파카 회장)씨였다. 하 사장의 원단 비즈니스의 큰 동력은 박동호 회장과의 끈끈한 유대관계에서 출발한다.

“(제가)수업료를 내고 배워야 할 비즈니스를 (박 회장은)술을 사주면서까지 가르쳐 줬습니다.” 하 사장은 “박 회장과의 인연은 그의 원단 인생에 큰 좌표가 됐다”는 말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1984년 효성물산에 입사했다. 중남미와 호주를 대상으로 한 원단수출이 주 업무였다. 중앙대학교(78학번)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섬유에 대한 흥미가 남달랐다.

이 때 박동호 회장을 만났다. 박 회장은 영남대학교 섬유공학과를 나와 동양폴리에스터 연구소 출신이었으나 영업마인드가 각별했다. 효성물산 내수원단사업부를 거쳤다. 하 사장이 박 회장을 만났던 84년 당시 그는 대구의 자카드 업체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하던 때였다.

각별한 섬유 흥미…수출에 정열 쏟아

박 회장은 수출 비즈니스가 주 업무였던 하 사장에게 트렌드 등 시장정보와 시직할 원단을 부탁했다. 그도 기꺼이 응했다. 반면 박 회장은 당시 JTM에 소개된 다양한 샘플을 통해 그의 원단 교육에 앞장섰다. 쌍방간 아낌없는 기브 앤 테이크의 컴비네이션이었다.

하 사장은 88년 효성물산을 떠나 직물 수출업체 미네르바로 자리를 옮겼다. 파나마를 중심으로 한 중남미 수출에 앞장서 1년도 채 안돼 4명의 직원과 일궈낸 수출규모는 3000만 달러에 달했다. 이 시점에 그는 박 회장과 제 2의 인연을 맺는 기회를 맞는다. 이 때 박 회장은 명보섬유 전무 직책으로 원단 개발과 로컬영업 책임자로 있었다.

“아무리 좋은 원단을 개발하더라도 좁은 로컬영업은 한계가 있잖습니까? 당시 명보섬유 배을출 사장이 그랬습니다. 박 회장의 원단개발력은 인정하는 데 팔 곳이 없는 거예요. 이 때 박 회장이 배 사장에게 다이렉트 무역을 권유했고, 책임자로 저를 추천했어요. 그 때 나이가 29세였습니다.”

유럽시장 고가 원단 수출 주역으로

하 사장은 박 회장이 배 사장에게 그를 추천하면서 한 말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고 했다. ‘나이 먹은 사람은 때 국물이 끼어 안된다’는 논리였다. 배 사장은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웃해 무역부를 맡겼다. 섬유입문 6년 만에 한 회사의 무역을 통째로 책임지는 기회를 맞았다. 기회 못지않게 박 회장이 NP분할사로 개발한 원단은 직수출 시장을 뚫는 데 큰 무기가 됐다.

“당시 박 회장이 개발한 피치스킨 원단 로컬가격은 44인치 기준 ㎡당 2달러80센트에 달했습니다. 생지 원가가 2달러 초반이었죠. 시장에서 ‘원단에 금테를 둘렀나’라는 이야기까지 나돌았어요. 이 무렵 샤무즈 원단이 1달러40센트, 자카드류가 1달러80센트였으니 그런 이야기가 터무니 없었던 것은 아니었죠.”

그렇지만 문제가 뒤따랐다. 국내시장은 너무 좁았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팔수가 없다는데 생각이 들자마자 유럽출장길에 올랐다. 48일 간 일정으로 유럽의 바이어를 찾아 나섰다. 당시 같은 제품인데 유럽에서는 일본 도레이산 원단이 ㎡당 10달러 이상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탈리아 바이어와 가격네고에 들어갔지요. 회사는 3달러 초반 가격대면 OK하라는 묵인이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일본산에 비해 반값이하 가격대면 아무리 품질이 좋더라도 짝퉁대접밖에 못받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바이어에 6달러 가격으로 오퍼를 냈는데 선뜻 OK하는 것 아닙니까.”

월 30만㎡씩 수출하는, 한 마디로 대박이었다. 그리고 유럽시장으로 바이어 파워를 늘리는 기회가 됐다. 품질보전을 위해 생산전담과 검품원이 따라 붙었다. 네고 담당 직원 1명을 포함 달랑 2명으로 출발한 무역부는 2년 만에 13명 규모로 늘어났다. 회사는 대대적인 설비투자에 나섰다. 모든 게 만사형통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무엇인가 발목을 잡는듯한 아쉬움은 떨칠 수가 없었다.

돈 맛을 본 조직은 변하기 시작했다. 박리다매, 볼륨을 통한 성장이었다. 서울사무소장에 중동 비즈니스 전문가가 오면서 중동마인드 색채가 강해졌다. 당장 월초 생산계획에서 배대조정에 밀렸다. 쿨피치 비즈니스, 중국 특수가 터지는 신호탄이었다. TTD 원사를 사용한 쿨피치 비즈니스는 한국 원단 수출의 큰 분수령이었다. 당시 로컬비즈니스에 한계를 느꼈던 내로라하는 국내 직물 간판주자들이 모두 중국수출에 뛰어들었다. 로컬로 쌓아온 신뢰와 명성은 뒷전으로 밀렸다. 그렇지만 신뢰의 추락은 하루아침의 일에 불과했다. 이를 입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도 않았다.

“내 바이어 만들자” 막스 앤 스펜서 등록 밀로

하 사장은 이 시점서 독립하겠다는 결심을 내린다. 결심은 우연찮게 다가왔지만 독립에 대한 영감은 남달랐던 것 같았다. 그는 명보섬유 입사에 앞서 3년간만 일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런데 3년째를 맞아 독립의 길을 이끄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특히 조직의 변화는 기폭제가 됐다.

“독립을 결심했는데 막상 내 바이어가 없는 것 아닙니까? 회사는 돈을 버는 데…. 당장 내 바이어를 만들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92년 6월30일 사표를 던지고 7월10일 바이어에게 회사 오픈을 알렸습니다.”

윈윈(WIN WIN)을 독립의 뜻으로 삼았다. 그러나 출발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와 바이어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사태가 터졌다. 기존 바이어들과 거래는 물론 유럽 바이어와도 손 떼야 했다. 독립 후 6개월이 지났는데도 오더 한 톨 없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바이어를 찾는 제 2의 장정에 나섰다.

“5년 만에 호주 바이어를 만나러 갔어요. 당시 호주시장은 가격대는 좋지만 물량이 적은, 소롯트 오더가 많았습니다. 대부분 오더가 3칼러, 6칼러 3000㎡짜리였어요. 그런데 호주에 자체 봉제시장이 생겨나는 게 아닙니까?”

하 사장이 호주 바이어를 만나러 간 당시는 호주 정부가 베트남 난민, 보트 피폴을 받아들이던 때였다. 이 때문이었는지 당시 호주의 인당 섬유소비량은 세계최고 수준에 있었다. 홈 메이드용 원단시장 태동을 부르면서 덩달아 원단 수출규모도 커졌다.

섬유는 다양한 인프라의 결집물…국내 현실은 반대

“오더 규모가 원 패턴에 10만 야드에 달했습니다. 프린트 오더는 2만 야드에 이를 정도였어요. 레이욘 샬리를 비롯 폴리 모스크랩 등 3가지 아이템으로 월 수출규모가 500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당시 유텍무역의 연간 호주시장 수출규모는 선경에 이어 2위를 내달렸다. 홀로서기에 나선지 5년, 잘 나가던 그는 새로운 비즈니스 도전에 나선다. IMF 금융위기를 맞아 모두 볼륨 수출에 젖어있을 때 과감히 품질비즈니스 카드를 빼냈다. 레이욘 맷 저지와 스판 저지류를 앞세워 영국 전통 브랜드 막스 앤 스펜서를 겨냥했다. 품질비즈니스 카드는 적중했다. 연간 수출규모가 1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 때 막스 앤 스펜서 수출은 품질을 보증하는 척도로 통했다. 품질 승부 ‘UNITEX’의 질주였다.

“전세비행기까지 동원해 막스 앤 스펜서 모로코 벤더기지에 원단을 공급했어요. 호주 힛트에 이어 연타석으로 힛트를 날린 겁니다. 그런데 시장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어요.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막스 앤 스펜서 오더가 사라지는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새 천년 시작을 앞두고 한 사장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품질비즈니스를 앞세워 호주(30%)와 막스 앤 스펜서(70%) 수출에 성장가도를 달렸지만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두 곳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크다는 게 이유였다. 여기에 주력 시장의 변화가 뒤따랐다. 이미 호주 봉제시장은 중국산 봉제에 휘청거릴 정도로 빠르게 붕괴돼 갔다. 당시 국내 섬유세일즈맨이라면 중동출장을 마치고 귀국길에 호주에 들리는 게 코스였다. 유태인이 장악했던 호주 봉제시장 또한 주체가 바뀌는 과도기를 맞아 이 비즈니스는 시장가격만 흐려놓았다.

유럽시장도 동일선 상에 있었다. 무결점을 지향하는 품질 중시 막스 앤 스펜서 옷이 잘 팔리지 않았다. ‘한 세대를 입는다’는 전통 판매기조가 뿌리째 흔들렸다. 막 앤 스펜서마저 아웃소싱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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