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노라 노 - ‘노라노’ 패션 60년은 한국 섬유패션 산업의 역사
[Special Interview] 노라 노 - ‘노라노’ 패션 60년은 한국 섬유패션 산업의 역사
  • 한국섬유신문 / /이영희 기자 yhlee@ktnews.com
  • 승인 2012.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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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 전 생애 걸고 ‘열정’을 디자인
반세기 외길 “후회없는 장밋빛 인생”


“노라 노는 한국에서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창조한 여인이다. 그녀는 한국산 실크를 세계에 알렸으며 그녀의 디자인은 세계적으로 퍼졌다”- 미국 브라운대학 교수.

한 가지 일을 반세기가 넘게 해 온 디자이너 ‘노라 노’를 향해서 늘 경외심과 찬사가 쏟아진다. 1928년 서울 출생인 노라 노는 ‘자고 눈을 뜨면 세상이 변해 있는’ 격동기 속에서 대한민국 패션의 역사를 열었고 전 생애를 걸고 ‘열정’을 디자인했다.

패션이 사치 산업이라고 치부하던 80년대 초반 ‘노라 노’는 연간 5만피스의 실크 여성복을 수출해 1000만불 실적을 달성했고 한국의 실크 소재와 디자인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뉴욕 7번가에서 ‘노라 노’의 고급의상이 일대 히트를 쳤으며 메이시 백화점의 15개 쇼윈도 전면이 한국산 실크 드레스로 도배되는 전무후무가 ‘기적’이 일어났다.

‘노라 노’는 ‘섬유산업’이 국가 산업중흥의 중추적 역할을 하리란 것을 알았고 몸소 섬유개발에 참여 했으며 제품차별화를 위해 직영 실크 프린트 공장을 설립해 가동했다.

“국산은 우수한 소재가 부족하다, 해외에 나가기 위해 지원이 부족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노라 노’ 선생은 따끔하게 일침을 가한다. “도전하라! 노라 노는 30년을 준비해 50대에 세계시장으로 나갔다. 이제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을, 무한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고 도전만으로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이다.

80대에도 또 다른 도전과 꿈을 꾸는 ‘현역’ 노라 노 는 말한다.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하고 반세기 넘게 고객의 사랑을 받아왔으니 나의 인생은 ‘장밋 빛 인생’ 이다. 감사할 일이다.”

7월, 창간 31주년을 맞는 한국섬유신문은 60년 패션인생 외길을 걸어 온 노라 노 선생과 특별 대담을 통해 “행복한 일, 행복한 인생”을 선사하고자 한다.

‘노라 노, 패션인생 60주년’을 기념한 전시회( 라 비앙 로즈(La Vie en Rose)展)가 열리던 5월 마지막 주 어느날, 초로의 부인이 쇼핑백 하나를 수줍게 건네줬다. 쇼핑백 안에는 60년 12월에 만든 ‘노라 노’의 웨딩드레스 한 벌이 들어있었다. 반세기를 고객이 보관한 웨딩드레스가 마침내 디자이너에게 되돌아오는 순간이었다.

고객은 자신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을 함께 한 드레스를 다른 누구에게 보다, 노라 노에게 돌려준다는 것에 오히려 감사했다고 한다. 60주년 전시회에는 고객들이 기증한 노라 노 의상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이번 전시회는 저의 패션인생을 조명하기 보다 현재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각 분야의 기초를 잡은 분들의 의상을 보여주고 젊은이들에게 패션의 뿌리를 찾아주고자 했던 겁니다. 한국에 이런 전시가 없다보니 또 하나의 ‘초유의 사건’을 만든 결과가 됐습니다.”

‘라 비앙 로즈’ 에는 패션을 전공하는 학생부터 예비, 현역 디자이너, 각계 인사와 일반인까지 끊임없는 방문이 이어졌고 단체의 경우 직접 설명하고 질문에 답하는 열정을 보여줬다. “10대에서 90대까지 전시장을 찾아왔어요. 아버지가 초, 중, 고교생 딸 셋을 데려와 교육을 시키는가 하면 90대 할머니와 딸이 과거를 회상할 수 있어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고 말씀해주셔 가슴이 뭉클 했답니다”라며 이 전시회는 또 다른 도전이었고 감동이었다고  전했다.

국산 실크로 하이패션 첫 수출
“1956년 유럽에서 공부한 후 귀국을 앞두고 이탈리아에 들렀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섬유가 발전하면서 국가부흥의 원동력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주재 미국의 대사 부인이 2차 대전 직후 섬유산업육성을 적극 도왔고 이 덕분에 산업과 경제가 함께 발전하고 있는 것을 눈으로 실감하게 된 것이죠. 이때에 저는 경제가 발전한 나라들은 ‘섬유산업’이 기초가 됐구나, 그러니 나도 한국에 돌아가면 고급 섬유개발에 앞장서야 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973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요청으로 국산 견직물 컬렉션을 준비해 파리에서 열리는 프레타포르테에 진출하게 됐다. 당시는 농민들이 농한기에 기른 누에에서 뽑은 견사 전량을 일본으로 수출했는데 코트라는 원사를 수출하기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직물이나 옷을 만들어 수출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장 견직물 공장을 돌며 소재개발에 들어갔고 당시 일본 기모노 원단을 생산하던 공장들의 시스템을 탈피, 양단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 리옹에 있는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양장을 만들 수 있는 직조시스템을 받아들이도록 했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 프레타포르테에 마침내 출품할 의상을 보냈는데 사흘만에 3백20벌, 당시 2만달러 상당의 수출계약이 성사됐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무역역사상 처음으로 국산소재로 만든 하이패션이 수출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뉴욕 삭스 백화점 2층 디자이너 코너에 대한민국 ‘노라 노’브랜드가 걸리게 됐다. “사실, 소재 개발은 1950년부터 시작했습니다. ‘한림수직’과 제일먼저 울 소재를 개발했습니다.

제주도에서 양을 키워 양털로 국산 모직을 만든 겁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독일로 차관을 받으러 갈 때 영부인께서 제가 만든 앙상블(원피스와 코트)을 입고 가신 겁니다. 그때는 염색이 쉽지 않아 양털 그대로의 내추럴한 색상의 의상을 입으셨는데 세련되고 좋아보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

60년대에는 면직물을 개발하기도 했다. 1969년에 미국면직협회가 한국면직협회와 공동으로 한국에서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고 한다. 미국협회에서는 목화 아가씨와 의상 십여 벌을 보내 한국에서 패션쇼를 열기로 했고 한국에서는 노라 노에게 패션쇼를 부탁했다.

“면직물 공장 열 군데를 돌면서 특수품을 골라 의상을 만들어 코튼 프로모션쇼를 했습니다. 이때 한국에서는 전문 모델이 없어 직접 뽑기도 했는데 1등이 ‘변자영’이었죠. 한국 최초의 전문모델로 나중에 크게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러니 제가 모델업계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한 셈이지요(웃음).”

“일신방직 공장에서 ‘데님’을 발견했을 때 흥분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저는 공장과 함께 원단을 재가공해 다양한 디자인을 개발했습니다. 미국에서 시작한 데님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었고 수출, 내수시장 모두가 커 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노력으로 노라 노는 1971년 방직협회로부터 ‘코튼 개발 공로상’을 받았다.

‘노라 노’의 국산소재 개발과 사랑은 7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 실크 의상 수출과 함께 더욱 깊어졌다. 뉴욕의 삭스 애비뉴에서는 350벌의 오더를 하면서 3개월내 납품을 요청했다. “제직하고 염색하고 디자인, 봉제까지 해야 하는데 당시 추석연휴가 된 겁니다. 그런데 공장의 최 고참 전문가가 직원들을 독려해 연휴에도 열심히 일을 해 줘 날짜에 맞춰 수출을 하게 됐습니다.

그 때는 사람들이 순수하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물론 사명감도 있었지요” 당시 에피소드를 덧붙이자면 “실크는 수세과정이 중요한데 시스템이 안 돼 있는 겁니다. 한강에서 돛단배에 원단을 묶어 몇바퀴 돌면서 수세를 했고 건조는 자갈밭에 말렸어요. 어찌보면 친 환경이지요. 당시 한강물이 정말 맑았거든요”라며 웃음을 띠었다.

제품을 받아 본 미국 삭스 백화점 바이어는 고객반응이 좋다고 리오더를 논의하기 위해 입국을 요구했다. 담당 바이어는 차후 오더량을 늘릴 테니 수출가격을 내리라고 했지만 노라 노 선생은 완강히 거절했다.

미국이 기억하는 한국은 전쟁으로 가난한 나라, 패션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쯤으로 여길 때였다. 한국에서 온 여성 디자이너를 보기 위해 자리를 찾은 미국 백화점 부사장과 임원들은 ‘노라 노’의 위상에 놀랐고 매료됐다.

벨벳 블라우스에 넓은 벨트, 롱 부츠를 신은 매력적인 동양여성의 당당함과 한국 실크와 디자인에 대한 자부심에 가격네고는 커녕 지원자가 되고 말았다.  ‘메이드 인 코리아’로 ‘디자이너 브랜드코너’ 에 입점해 대박행진을 이어가자 뉴욕 타임즈 기자가 대서 특필 하기도 했다.

“어느날 운이 좋아 이뤄진 결과가 아니었어요.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파리컬렉션을 보러 다녔고 미국시장에 대한 조사를 철저해 했어요. 하와이에서 부티크를 운영하면서 고객들의 신체사이즈를 일일이 입력하고 표준체형을 산출해 둔 것입니다.” 노라 노 선생은 미국여성의 히프가 평균치수 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됐고 미국으로 수출할 의상을 이를 기준으로 제작했다.

미국 바이어는 “동양에서 수입한 옷은 사이즈가 안 맞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노라 노’의 옷은 마네킹에 입히면 정확하게 맞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뉴욕 타임즈 기자는 “앞으로 패션이 어디서 오려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코멘트로 한국패션의 삭스백화점 입성에 대한 메시지를 남겼다.

15년간 뉴욕에서 대히트
“74년 잠사협회에서 프로모션을 하면서 패션쇼를 요청해 왔습니다. 한국은 아직 일일이 드라이크리닝을 해야 하는 실크가 대중화될 수 없는데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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