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 새로운 느낌 주는 것이 ‘예술의 정수’
[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 새로운 느낌 주는 것이 ‘예술의 정수’
  • 편집부 / ktnews@ktnews.com
  • 승인 2012.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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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삶 속에 완전 몰입
분야별 예술 발전 큰 기여
청평에 박물관 조성 중

‘제 4집단’의 활약상은 일거수 일투족이 화제가 됐다. 지금도 손일광 선생의 별장과 아뜰리에에 석, 박사 논문을 쓰는 미술학도들의 인터뷰 요청이 ‘잊을만 하면’ 지속된다.

남과 다른, 아니 남과 같기 싫은 4차원의 젊은 예술가들은 디자이너 손일광의 의상실 아방가르드(A.G)를 아지트로 7~8년간 활동을 하다가 와해됐다. 사실 ‘와해’됐다는 표현보다는 언제까지나 ‘청년’일 수 없는 멤버들이 더욱 심도있는 예술 활동을 위해, 혹은 자신의 삶속으로 완전히 용해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시작은 정찬승이 미국유학을 가면서였다. 이후 김구림, 방태수도 유학길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됐다.

당시 유명 주간지는 “정찬승은 여류화가 김희와 비원에서 ‘해프닝’이 아닌 ‘결혼식’을 올렸다. 장발, 해프닝, 보디 페인팅, 대지 예술 등 갖가지 전위예술을 꽃피웠던 ‘제 4집단’은 정찬승씨의 결혼으로 질풍노도의 시대를 마감했다”고 정찬승의 결혼식을 기사화했다.

기사 머리글 말미에는 “옷 벗기로 이름났던 시대는 가고 옷 입기를 배우는 ‘제 4집단’의 오늘”로 표기돼 있다. 신부 김희는 경기여고,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했으며 66년 프랑스로 건너가 디자인 공부를 한 재원이었다. 70년에 귀국해 두 차례의 패션쇼를 가졌으며 ‘김희 살롱’을 열어 활동하고 있었다. 손일광 선생은 두 사람의 만남에 가교역할을 했다. 또 제 4집단의 이론가이자 대지예술을 도입한 김구림은 ‘미(美)’ 수예점을 차렸다.

자수명인 송정인과 결혼한 김구림은 특유의 마케팅능력을 살려 수예점을 활기차게 운영했다. 송정인은 자수를 현대미술처럼 예술로 승화시킨 대표적 명인으로 대접받고 있을 때였다. 미국, 일본인 등 외국인 35명을 비롯 총 50여명의 수강생들이 수예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를 찾았다. 이때에 디자이너 손일광은 아들 ‘이광’을 낳아 재롱에 빠져들어 있는 한편, 정강자는 “벗기보다 입기가 더 어렵다”며 “결혼보다는 미술만을 생각하며 살고 싶다”는 인터뷰를 했다.

디자이너 손일광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종이옷을 소개한 예술가로 알려졌고 “살롱 아방가르드는 요즘 같은 불황에도 온통 단골 손님으로 북적인다”라며 평온한 삶을 알려주는 기사가 실렸다.

과거는 현재의 원동력
정찬승은 오래전 하늘나라로 떠났다. 강남성모병원에서 대장암으로 투병 중일 때 손 선생은 오랜 친구의 문병을 갔다. “미국 생활하면서 햄버거와 술만 먹어서 병에 걸린 것 같다”고 손 선생은 안타까워했다.

그가 조선일보의 초대전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던 오브제를 손일광 선생이 보관하고 있었으나 ‘어찌어찌 해’ 잃어버렸다고, 그 것이 있었으면 친구 보듯 좋았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손 선생은 정찬승에게 그가 평생 쓰던 붓을 하나 달라고 했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지만 그 뒤 정찬승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도 중요하지만 손길이 느껴지는 예술도구를 가져와 청평의 갤러리에 전시하고 싶었던 것이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판토마임 전수자 방태수(방거지)는 현재 예술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있다. 정강자는 이미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대표 화가로 명망을 얻고 있다. 지난 4월 초순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강렬한 색상과 터치, 열정이 느껴지는 화풍이 또 다시 일간지에 소개됐다.

개인전을 다녀온 손일광 선생은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기자가 찾아간 손 선생의 청평 갤러리에는 정강자의 초기 작품이 보관돼 있었다. 정강자씨로부터 작품을 선물 받은 적이 없지만 주변의 갤러리 유관업무를 하는 이로부터 입수해 두었다며 요즘은 ‘건지기 힘든 작품’이라며 소탈하게 웃었다.

젊음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마음과 생각이 젊은 사람은 과거를 추억하기 보다 매일매일을 추억거리로 만들어 나간다. 과거가 현재를 지배해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발전의 원동력이 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예술가로 산 손일광 선생의 삶이 그러하다. 많은 스토리와 영감을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 후배들에게 베풀기 위해 손 선생은 청평에 갤러리와 박물관을 짓고 있다. 손수 장작을 패고 정원을 가꾸고 인부들과 일을 함께 하면서 또 다른 내일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기발한 발상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매일 매일 ‘해프닝’을 연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디자이너 손일광의 삶에 원동력이 돼 준 ‘제 4집단’은 한국 미술사에 아로 새겨졌고 손일광은 또 다른 행보를 내딛게 됐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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