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 ‘명동패션’ 뒤로 하고 ‘기성복시대’ 도전장
[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 ‘명동패션’ 뒤로 하고 ‘기성복시대’ 도전장
  • 편집부 / ktnews@ktnews.com
  • 승인 2012.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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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집단’이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설 무렵, 불황이 찾아왔지만 디자이너 손일광의 의상실은 단골 손님으로 북적였다. 열렬한 팬(단골)의 일편단심도 크게 작용했지만 남다른 감각과 고객만족 서비스도 철저했기 때문이다. 지인들이 제보하기를 “특별한 서비스가 없었더라도 손일광의 미소만으로도 고객만족도(?)가 높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기자는 확인된 바 없음으로 부가설명을 생략하기로 한다.

당시 부자들은 딸을 시집보낼 때 옷을 많이 맞춰갔다고 한다. 시집갈 때 부러움의 대상 1순위가 옷을 많이 만들어 가는 것이고 2순위가 아파트 열쇠였다고 하니 젊은 아가씨들의 패션에 대한 욕구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손일광 선생은 뉴스타일의 디자이너로 재직할 때 최고 100벌까지 주문을 하는 예비 신부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적정한 기간을 두고 사계절 옷을 계속 디자인하고 짓고, 마지막 100번째 의상으로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대미를 장식했다는 것. 또한 졸업이나 입학, 취업을 했을 경우 자녀들에게 선물로 옷을 맞춰주는 것이 대세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성복이 확장되기 전 명동일대의 의상실들은 제대로 알찬 호사를 누렸던 것 같다.

유학을 간 딸에게 옷을 지어 보내기 위해 손일광 디자이너를 찾는 경우도 많았는데 키와 허리사이즈, 그리고 본인의 전신 사진을 참고해 만들어주면 대부분 “잘 맞다”고 만족해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젊은 아가씨들의 맞춤 성향은 유명잡지에 실린 해외배우들이나 연예인들의 사진을 오려와 “그대로 해달라”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옷 한 벌 가격은 2~3만 원이었는데 싼 캐주얼 기성복이 없었던 때라 ‘명동패션’은 부자와 최신 유행을 동경하는 사람들로부터 패션의 메카로 추앙받고 급성장했다.

손일광 선생은 지인들에게는 평생 간직할 만한 독특한 의상을 지어주곤 했는데 언발란스 하거나 아방가르드한 스타일, 혹은 당시에 다른 디자이너들이 흉내낼 수 없을 정도의 패턴 변형, 이색 소재를 적용하기도 했다.

1968년부터 의상실을 열어 디자이너로서 창작의 길을 걸었고 한국미술사의 획을 그은 ‘제 4집단’의 창립멤버로 활약했던 손일광은 본격적인 기성복시대가 열리고 있었던 1976년 14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 율산그룹의 수석디자이너로 채용되면서 제 2의 인생길에 접어들게 된다.

‘밤빔’수석디자이너 MD개념 도입
70년대 후반은 ‘맥그리거’, ‘반도패션’, ‘뱅뱅’등이 기성복시장을 주도하던 때였고 율산은 계열사 경흥물산을 통해 기성복 ‘밤빔’을 런칭, 제조를 함으로써 도전장을 던졌다. 율산그룹은 당시 20,30대 젊은 인재들이 모여 한국기업역사상 유일하게 정경 유착없이 급성장한 촉망받는 기업이었다. 14개 계열사 중 하나인 율산 알루미늄 공장을 오픈할 때 사우디 알파사왕자가 직접 내한해 테이프커팅을 할 만큼 중동에서의 인맥과 수출파워 또한 대단했다.

율산그룹은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모으고 있었고 손일광은 오너와 면담을 하는 자리를 가졌다. 손일광 선생은 “다양한 인재들이 많을 텐데 왜 나처럼 월급을 많이 줘야 하는 기능 특A급 인력을 뽑는가?”라고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 때 오너는 “돈은 은행에 가면 많이 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기업에 많으면 그 기업은 부자다. 오너의 본분은 훌륭한 인재를 모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율산그룹의 젊은 인재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짧은 시간에 급성장 한 원동력은 “이들이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며칠 밤을 새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정도의 정신력”이라고 당시 언론들은 평가하고 있다. ‘열정’에 있어 2등가라면 서럽고 오기나는 사람이 바로 손일광이다. 손일광 선생이 율산그룹에서 수석디자이너로 일할 때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패션MD 개념이 도입됐고 어쩔수 없이 ‘최초’의 수식어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됐다.

화공학과 출신으로 디자이너가 됐던 손일광은 제 2의 인생길을 ‘제대로’ 개척해 보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항상 해 뜨기 전 어두울 때 제일먼저 출근했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했다. 손선생은 그 때를 회고하며 “해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제관련 책을 거의 다 독파하다 시피했고 마켓상황은 물론 이론과 실무에 모두 능통한 전문가로 거듭났다.

서울대학교 출신조차도 손선생의 해박한 지식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하니 부연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밤빔’은 78년 9월 추석직전 오픈하고 매장을 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밤빔’ 오픈을 기점으로 율산그룹의 아성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 기사를 참조하자면 올곧게 급성장하는 젊은 그룹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이들의 표적수사라는 그물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라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추석을 앞두고 발매한 티켓을 ‘대가성’이라며 수사를 시작했고 비단 ‘밤빔’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타겟으로 공략을 해 대면서 거대신화는 점진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당시 모 언론에서 저명한 교수의 말을 빌어 “정경 유착 없이 유일하게 급성장한 회사가 반시장적 원리로 몰락한 대표적인 사례”라면서 안타까움을 토로한 기사를 게재했다. 또한 부도를 당하고도 임금체불이라는 근로기준법 위반이 없었던 유일한 기업으로도 기록됐다.

어찌됐든 손일광 선생은 우리나라 기성복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던 ‘밤빔’의 수석디자이너이자 최초의 MD로서 또 다른 물꼬를 텄고 1978년 모라도의 상임자문으로, 호서양행의 이사로 70~80년대까지 현역생활을 계속했다. 업계의 실력자로서 활약해 온 손일광선생에 대한 입소문을 듣고 올림픽준비위원회에서 88년 서울올림픽 때 마침내 로봇의상디자인 의뢰를 하게 됐고 이원상사를 설립해 경영하는 등 열정적 삶을 지속해 갔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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