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밤섬"귀향과 "문화인 카니발"의 추억…조능식
마포"밤섬"귀향과 "문화인 카니발"의 추억…조능식
  • 한국섬유신문 / news@ktnews.com
  • 승인 1998.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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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원(水資源)확보나 개발 등의 이름으로 전국 도처 에 「댐」이 만들어졌고 강이나 늪지대가 훼손돼 나가 곤 했다. 그래서 졸지에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슬픔은 북에 다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의 그것과 못지 않은 이가 많으리라 본다. 서울 한복판에서 고향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있다. 바 로 마포강변에 있던 「밤섬」의 원주민들이다. 68년 한강개발계획에 따라 4만7천여평의 밤섬은 폭파돼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서 나온 돌들은 트럭 4만대분으로 여의도 윤중제공 사에 쓰였다. 조선의 한양천도 이래 17대째 농사짓고 고기잡이로 생 활해오던 62가구 4백43명의 밤섬 원주민들은 허는수 없 이 <뭍>으로 이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예부터 서울 마포강변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이름났던 곳. 그 중에서도 강 가운데 넓게 펼쳐진 <밤섬>의 모 래밭은 「율도명사(栗島明沙)」라 하여 마포팔경(麻浦 八景)의 으뜸이었다. 이 곳에는 뽕나무와 감초 자약등 약초를 많이 심고 소 염소 등을 놓아 길렀다. 약포와 목축을 관리하는 관리 인들도 나와 있었다. 또 섬에는 고려시대의 명신「김수」가 심었다는 두 그 루의 은행나무가 있어 유명했다. “신령한 약초냄새는 천태산에라도 들어온듯 좋은 술에 취한 기분- 수중(水中)선가(仙家)가 여기라네” 오죽하 면 이렇게 읊었을까-. 밤섬은 해방이 되고도 예전 모습 그대로여서 여름이면 서울시민들이 즐겨찾는 피서지였다. ▼6.25전쟁이 끝나고 서울이 수복된 50년대 중반일이 다.(정확한 일시를 기억못한다). 서울로 돌아온 각계각층의 예술문화인 들의 유일무이한 집합장소는 명동에 있던 「동방문화회관=사장 김동근 (金東根)」이었다. 아담한 3층 건물의 아래층은 다방, 2 층은 문인들의 집필실로 개방되었고 회관뒷마당에는 「베비골프장=모이는 문화예술인을 위해」을 마련하기 도 했다. 남쪽으로 피난갔던 「예총」이 서울로 돌아왔지만 폐어 가 돼버린 서울에는 「한국 예술인 총연합회」의 사무 실 하나조차 얻기 힘들었었다. 이 때 동방문화회관 김동근사장은 흔쾌히 3층을 「예 총」사무실로 제공했다(물론 임대료 같은 것은 없었 다). 그 당시의 예총회장은 불문학의 이헌구(李軒求)선 생 (나중에 이화여대 문리대학장 역임)선생이었다. ▼매일 아래층 <동방쌀롱>에는 재서울의 작가, 화가, 연극영화인, 음악인과 언론인들이 모여들었다(이곳은 이들의 사무실이며 응접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문화인들에게 베푼 동방문화회관 사장 <김동근>은 문화훈장을 받고도 남을 위인이었지 만 그 주변의 모두가 다같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실타래子의 가슴은 이따금 쓰리고 저려오는 것이다.(당 시 김사장은 미8군의 사진현상을 도맡아하고 있었다. 동방문화회관 뒷편에서). 바로 그 때 「예총」과 「동방문화회관사장 김동근(재 정을 전부부담)」과 「동방쌀롱」에 매일 출근(?)하던 문화예술들이 총집합하여 8월초 마포밤섬에서 「문회인 카니발」을 대대적으로 베풀었다. -이날 밤섬에서 놀다 해질무렵 돌아오는 강변에서 나 룻배중 하나가 인원초과로<뭍>을 지척에다 두고 침몰 -. 그 배에는 김동근사장과 열한살짜리 그의 장남이 타 고 있다 참사를 당하고 말았다. 나중에 시체를 인양해보니 김사장 부자는 손을 꼭 잡은 채였다. 물론 김사장부자외의 다른 사람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왔다. 또 다른 배에 탔던 사람들은 무사했다-. 「문화인 카니발」은 이렇게 눈물바다로 막을 내렸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엔 세상없이도 낚시를 갔던 실타래子였기에 낚시가 생명을 건져준 셈이됐다. 왜냐하면 김사장과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에 틀 림없이 그의 옆에 같이 손잡고 앉아 있었을 것이니까 -). ▼마포밤섬은 이렇게 실타래子에겐 아픈 추억의 한토막 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밤섬에서 쫓겨났던 원주민들 1 백50명은 본적조차 없어졌다가 지난 14일 30년만에 < 마포구청>의 주선으로 철새의 낙원으로 남아있는 밤섬 을 방문했다는 소식이어서 남다른 감회다. 이들에게는 그대도 찾을 고향의 흔적이라도 남아있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싶다. -동방문화회관은 김동근사장이 돌아가자 그 후 얼마 안가 유족들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속식을 들었다. 지금은 명동(그 전의 석탄공사옆) 에스콰이어의 가게와 그 공지 앞에 그을름으로 얼룩진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 다-. 대중식당의 간판을 달고… 들은바에 의하면 「재건축 허가」때문에 초라한 모습의 옛<동방문화회관>은 그대로 방치돼 서 있다는 얘기다. -그 모습에서 흘러가버린 가난했던 이 땅의 문화예술 인들을 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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