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나에게 수리할 권리가 있다
[오피니언 기고] 나에게 수리할 권리가 있다
  • 윤대영 수석전문위원 / yoondayyoung@hanmail.net
  • 승인 2023.08.18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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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쓰레기 양산 해법 없는가
제품수리권, 유럽이 논의 빨랐지만
미국 뉴욕·콜로라도가 먼저 실행

제품 정보 부실·부분 수리 어려워
기업, 소비자 수리권 인정에 미온적

영국 데이비드 카메론 총리 시절 ‘10번가 정책실’의 책임자였던 카밀라 카벤디시(Camilla CAVENDISH)는 건강에 해로운 설탕 함유 음료에 처음으로 ‘설탕세’를 추진해 비만 예방에 기여했다. 그의 2019년 작 <엑스트라 타임(EXTRA TIME)>이 한국에서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고령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사회에서 건강하고 오래 살려면 나이를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일에 계속 도전하라는 조언을 담았다.

사회 현실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관심은 건강과 복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2023년 8월 5일자 파이낸셜타임즈 지에 쓴 칼럼에서는 시민들이 전자제품 쓰레기를 양산하게 되는 이유를 다뤘다. 새로 산 잉크젯 프린터에 잉크 카트리지를 교체할 때 타 사 제품을 사용하는 순간 에러 표시가 뜬다. 필터에 낀 보풀을 제거해주지 않으면 신형 건조기인데도 멈춰버린다. 방문 수리기사는 세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디자인한 제품 같다고 불평이다.

새로 산 인덕션에 맞는 전용 그릇과 프라이팬이 아니라면 아무리 비싸고 좋아도 쓰지 못한다. 국적을 초월해 누구나 일상에서 겪는 일이다. 칼럼은 EU가 추진하는 전자제품 2년 의무 보증과 10년간 부품 생산 의무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0년 보증을 주장하며 끝맺는다. 

플라스틱 장난감 분해전(왼쪽)과 분해후(오른쪽) 모습. 내부에 전자기판과 용수철, 전선이 복잡하게 뒤엉켜있어서 수리와 분해가 어렵다. 플라스틱으로 버리면 안되고 종량제 봉투에 넣어야 한다. 사진=윤대영 수석전문위원

유럽의 제품수리권 논의는 미국보다 빨랐지만, 실행에서는 미국이 한발 앞선다. 2022년 12월 뉴욕 주가 전자제품 수리권 보호법을 통과시켰고, 2023년 4월 콜로라도 주지사는 농기계 수리권 보호법에 서명했다. 기업이 제품 수리권을 독점하려는 시도는 미국에서 하나 둘씩 깨져나가고 있다. 

제품을 수리해가면서 오래 쓰고 자원을 절약하려는 시민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하지만, 당장 이익을 내야만 생존하는 기업으로서는 야속한 세태이다. 기업은 정부와 시민의 단결을 저지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제품 수리에 미온적인 애플과 테슬라가 소송전에 휩싸이고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애플은 사용자 DIY 수리 지원센터를 열었지만 예약한 부품을 제때 공급하지 않거나 전문가 양성을 교묘하게 지연시키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제조자가 소비자에게 제품을 판매하지 말고, 제품 사용권을 임대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제품 소유자는 구매자가 아니라 기업이다. 기업은 제품 수명이 길어질수록 이익이니, 고의로 제품 수명을 단축하지 못하리라는 취지다. 

시민들이 스스로 제품을 분해하여 수리하는 운동이 확대되고 있다. 2019년 서울새활용플라자에서 열린 제품 수리 행사 모습. 사진=윤대영
시민들이 스스로 제품을 분해하여 수리하는 운동이 확대되고 있다. 2019년 서울새활용플라자에서 열린 제품 수리 행사 모습. 사진=윤대영 수석전문위원

사용자가 제품을 쉽게 분해하게 허용하면 안 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생산기술이 발달하여 첨단 고기능 제품이 많아졌기 때문에 공학적 지식과 기술이 부족한 사용자가 함부로 다루었다가는 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꽤 일리 있는 주장이다. 요즘처럼 원가절감을 위해 부품 여러 개를 연결해 거푸집 하나로 찍어내면, 부분 수리도 쉽지 않다. 그동안 기업이 소비자의 수리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다. 

올해 3월 EU가 제품수리권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자, 일본경영협회는 유럽 시장에 진출한 일본계 빅테크 기업에게 미칠 파장에 촉각을 세웠다. 세계적으로 지속가능 경영이 강화되니 시민 수리권 보호에는 찬성하나, 제품 보증기간 연장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를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부품 교체시 사용자 실수로 제품이 망가졌을 때 책임을 규명해야 하는 거추장스러움도 언급되어 있다.

에어컨은 공기와 물을 다루는 전자제품으로 온도와 습기에 민감하다. 여름에 번식한 곰팡이를 청소하기 위해 분해하려면 복잡한 구조 때문에 애를 먹는다.  사진=윤대영
에어컨은 공기와 물을 다루는 전자제품으로 온도와 습기에 민감하다. 여름에 번식한 곰팡이를 청소하기 위해 분해하려면 복잡한 구조 때문에 애를 먹는다. 사진=윤대영 수석전문위원

폭염 등 기상이변으로 몸살을 앓는 지구촌에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무덥고 습한 실내 공기를 식혀주느라 쉬지 못한 에어컨도 여기저기 살펴야 한다. 불과 5년 전 제품인데 분해청소를 위한 설명 정보가 제조사 홈페이지에도 부실하다. 여기저기 개인이 올린 자료를 찾아본 뒤 뚜껑을 열고 조심조심 분해를 해봤다. 

구석구석 열심히 닦아내지만, 특수장비도 없이 플라스틱 부품 연결 부위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숨은 곰팡이를 어찌할 길이 없다. 내 손으로 청소하기 어렵고, 분해 수리도 어려운 제품을 언제까지 이렇게 사서 쓰다가 쉽게 버려야 하는지, 과연 내게 수리할 권리는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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